[2018.01.25] 교육에 대한 짧은 생각.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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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포스트를 보고 10줄 가까이 글을 썼는데 다 지워버렸다. 지워진 글들의 내용은 대충 꿈을 찾으려고 인강 보기 전에 자기자신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쓰고 보니 꼰대가 된 느낌이고, 이 말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어 지워버렸다.

나의 생각, 능력, 그리고 성취들이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래서 항상 일기를 쓸때는 내가 왜 이런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까지 써야 하는 법이다.) 20대 중반의 나이를 먹은 지금 이미 10대 시절의 기억이나 감정을 잃어버리거나 왜곡하고, 그들의 시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잊어먹었다. 나은 교육자가 되려면 10대들의 삶과 경험의 정보를 가지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1. 사람은 나름의 논리를 먼저 세우고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기초 지식이 있어야 세울 논리라도 있게 되는 걸까?

2. 내가 지금(20대 중반) 할 수 있는 것들이 과거(10대)의 나도 할 수 있는 것들인가? 학습과 훈련이 동반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들인가?

3. 꿈을 찾고, 단계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망을 밝히고, 계획을 짜고, 논리를 정리하는 따위의 일들을 10대의 내가 할 수 있는가? 교육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가?

4.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선 10대들의 삶과 경험, 그들의 시야에서 바라본 세상과 같은 정보들이 나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발제] <서양사강의> 1장. 고대 지중해 세계 역사



발제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책의 초판 머리말을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음. 어떤 책이든 서문을 읽음으로써 책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음. 그런데 특히 서양사 강의의 서문은 쉽고 간결하게 쓰여서 서문의 가치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보는 관점을 고민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함.



서문을 읽어보면 저자는 서양사를 이해하는 관점을 가장 고민했음을 알 수 있음. 서양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의 현실 인식을 드러내면서 규정된다고 하는데 그 현실의 핵심으로 민족 분단과 계급 갈등을 꼽고 있음. 그 현실이 미국▪소련의 패권 경쟁과 자본주의 세계 체제 편성, 더 멀리는 근대 초기 유럽의 세력 팽창이 가져온 산물이기 때문임. 그러나 이런 서양사학이 우리와 서양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설정할 것을 우려해야 한다는 점도 명백히 밝히고 있음. 서양을 단순히 비교의 대상이나 준거의 틀로서 취급하지 않고, 민족 분단과 계급 갈등에 작용하는 외적 요인들을 적절하게 해명하고 그러한 현실에 이르기까지 누적된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넓은 시야에서 파악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음.



왜냐면 이 책의 비유를 빌리자면 역사는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산과 같은 것이기 때문임. 역사학적 지식은 우리가 서있는 지점에서 역사라는 산을 바라보고 알아내는 것을 중심으로 삼되, 다른 지점에서 관찰해서 얻은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수용하고, 그럼으로써 가능한 한 전체의 모습을 그려내려는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임.



그렇다면 이 책의 사관은 무엇인가. 서문은 이 책이 목적론적 사관을 거부하지만 역사는 사회의 전체성(全體性)을 동력 삼아 움직이고 있다고 했음. 역사가 어떤 목적에 따라 일관된 흐름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토대’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님. 사회 세력 사이의 역학관계가 장기적으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변동과 접합되어 기존의 역학관계를 끊임없이 바꾸면서 새로운 사회구조를 수립하는 식으로 역사는 전개된다고 보고 있음.

이런 사관에 따라 쓰인 서양사 강의를 독파하면 민족 분단과 계급 갈등의 현실에 선 우리가 나름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책읽기가 끝날 때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음. 그리고 발제자는 이런 사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1장 발제가 끝난 다음에 서술하도록 하겠음.



 

제 1장. 고대 지중해 세계

 


1장의 제목이 ‘고대 지중해 세계’로 쓰인 이유는 그리스▪로마가 고대사회의 유일한 맹주가 아니라, 다른 지역들과 대등하게 고대 세계의 한 회원일 따름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암시하고, 그리스▪로마사의 전체적 성격을 규정한 자연적 조건을 함축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임. 그렇다면 중동이나 이집트의 역사도 다뤄도 좋았겠지만... 어쨌든 자연적 조건을 꼽자면 여름에 고온 건조, 겨울에 온난 다습, 건식 농법이 불가피한 토양 조건, 석재는 풍부하고 목재는 부족한 점이 있겠음. 게다가 육로보다 해운이 수월한 교통수단이어서 지중해 세계 주민들의 생활양식이 강한 해양성을 띠게 되고, 이런 요인들은 지중해 세계가 활발한 상품 및 화폐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해줬음.



또한 고대 지중해 세계라는 개념은 그리스사와 로마사를 지중해 지역의 폴리스가 발전하고, 오리엔트 문명과 접촉 및 전쟁이라는 관계를 쌓으며, 마케도니아로 시작되어 영토국가로 발전하는 헬레니즘 세계가 되었다가, 로마제국으로 수렴되는 흐름에 따라 연속성을 가지는 역사의 한 단위로 파악하는데 기인함.



 

고대 지중해 세계의 출발점이 되는 폴리스의 성립은 BC 1200년 경, 인도▪유럽어 족에 속하는 발칸 반도 북부 주민들이(도리아인) 남하하면서 선주민인 미케네인들의 문명이 파괴되면서 시작함. 미케네 문명의 파괴 이후는 암흑시대로 불리면서 문자기록을 발견하기 어렵지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암흑기 후반의 사회상과 폴리스 성립으로 이어지는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음.

 



- 농경 및 가축사육의 경제

-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와 그 자문 역인 촌장들이 모두 바실레우스(Basileus)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군주권이 미약하며 세습이 불가능할 정도.

- 바실레우스들이 국지적으로 결합하고 우의를 나누며, 원정이 공통 활동이었으며 전리품을 우의의 표시로 나눔.

- 이 바실레우스들은 상대적으로 가계(okios)의 규모가 큰 집단의 수장이며, 그 집단엔 노예나 시종 같은 비혈연자들이 포함되었음.

- 이를 종합해서 볼 때 암흑기 후반은 ‘맹아적 귀족사회’였음.

 



이런 식으로 암흑기 후반의 사회가 안정되고 오리엔트 문명과 다시 접촉▪교류 하면서 폴리스의 성립으로 이어짐. 점진적 사회 안정과 농업기술의 혁신은 토지 부족 현상을 불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지역을 정복하거나 남아나는 주민들을 방출함. 서로 정복하는 시대에서 바실레우스들은 제도적으로 강한 결합이 필요했고 이들은 아크로폴리스(에게해, 발칸 반도 해안의 언덕)에 집주함. 그리고 이곳에 오리엔트 문명의 페니키아 상인들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발전했고,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모여듬. 시민들은 농촌경제로 이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초기 폴리스가 성립됨.



자연히 폴리스 시민의 자격은 폴리스에서 토지를 갖는 것이 됨. 또한 폴리스에서 참정권은 방위의 의무에서 비롯되었고 방위를 위해선 말과 무구를 갖출 수 있는 재력이 필요했음. 역시 재력이 있는 귀족의 참정권이 시민들의 그것보다 우선할 수밖에 없었음. 이 귀족들끼리는 정치투쟁이 일어났고, 투쟁에 승리하기 위하여 시민들을 포섭하여 세를 불렸음. 이것이 ‘형제단’이라고 불림. 암흑기를 거쳐 성립된 폴리스의 제도는 자연스럽게 ‘귀족정’이 됨.



사회가 안정될수록 인구는 늘어나고 토지는 부족하게 되는 법. 폴리스 성립 이후에도 공유지 확보를 위한 정복과 방출(식민지 건설)은 필요했고 BC 8C 중엽~ 6C까지 조직적인 해외 식민지 건설이 추진되었음. 늘어나는 식민지에 따라 상업은 발전하고, 덩달아 포도주와 올리브가 주요 상품목이 되고 귀족들의 사치 욕구를 자극하여 소농토지 겸병을 통한 대토지 소유 경향이 확산됨. 따라서 소농민들의 궁핍화도 나타남.



초기 폴리스의 귀족정은 흥미롭게도 전술의 변화 때문에 위기에 처함. 소수의 귀족들이 무장한 기병 전술보다 전투력이 강한 다수 중무장 보병의 밀집대형 전술이 발견되었고,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출발한 폴리스들은 방위를 위해서 이 전술을 택해야 했음. 오리엔트 문명에서 도입된 무구, 수공업의 진전이 불러온 무구 가격의 하락과 상공업자들의 성장은 전술의 변화를 촉진했음. 그리고 중무장 보병을 담당한 시민들의 애국심과 참정 욕구는 결국 귀족정의 붕괴를 불러옴.



 

이 다음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통해 폴리스의 흥망성쇠를 보자. 비록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전형적인 폴리스의 형태는 아니지만.

 


아테네의 예를 들면 귀족정 붕괴 이후 참주정이 잠깐 나타나지만, 군주제의 변형인 참주정은 시민들의 참정 욕구라는 폴리스의 발전 방향과 양립할 수 없었음. 이렇게 아테네 스타일의 폴리스는 민주정으로 발전. 특히 이 민주정에서 노예제는 필수였는데, 정치를 하려면 생계는 노예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 그래서 노예구매가 가능한 부유층이나 중산시민층들이 사실상 시정(市政)을 할 수 있었음. 더군다나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돋움은 비그리스계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구매했고, 이들은 석공예▪수공예▪금융업▪상공업 분야에서 활약하기도 했음. 일반적으로 농가에선 1~2명의 노예가 있는 것으로 추정.



아테네에서 이 발전 방향은 ‘페르시아 전쟁’으로 더욱 촉진됨. 바다를 건너오는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아테네의 해군력은 강화되었고, 당시 함선은 갤리선으로 노잡이가 필수적인데 하층시민들이 노잡이로서 군대에 복무함. 별다른 무기의 구입 없이 없는 재력으로 병역의 의무를 지을 수 있었고, 따라서 폴리스의 원리상 이들의 정치력도 향상됨. 또한 해군력의 향상은 델로스 동맹에 제국주의적 수탈을 강요할 수 있었고, 여기서 얻은 재원은 민주정 유지에 도움이 됨.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가 도입한 공무수당제는 델로스 동맹에서 얻은 재원을 정치하는 시민들에게 수당으로 주면서 하층시민의 정치참여를 활성화함. 이렇게 참여민주정은 확대됐지만 역설적으로 아테네 시민의 자격 조건은 「시민권법」으로 엄격해짐. 재원을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으니까. 노예제, 민주주의의 진전은 아테네에서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찍을 수 있도록 했음.


 

스파르타는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바로 그 도리아계 민족으로 주변의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같은 평원지역을 정복하면서 풍족해짐. 이런 스파르타의 초기 성립 단계는 스파르타의 독특한 신분제도를 만들어냈음.



스파르티아테스

초창기 스파르타의 소수 전사 지배층. 갈수록 이 계층에서 불평등이 확산되었다.

페리오이코이

준시민. 상공업을 담당했다.

헤일로타이

피정복민 출신의 예속농민. 아테네 노예와의 차이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국가가 소유자라는 점.



그런데 페르시아도 BC 7C 중엽에 메세니아 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일대 개혁을 추진한다. 지배층 보다 피지배층이 월등히 많은 현실을 직시하고 지배층의 군사화(훈련제도 agoge)와 평균화(균등한 토지분배와 화폐제도, 귀금속 추방. 곧 동등자들, homoioi로 불렸다.)를 꾀한 것이다. 중무장 보병 밀집 대형 전술은 이 개혁을 필요로 했고, 또 개혁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비교



 

아테네

스파르타

공통점

내부적

시민단은 민주화 되어가지만 동시에 폐쇄적인 경향을 띄는 방향으로 폴리스의 기능과 목적이 강화되었다.

외부적

폴리스의 기능과 목적의 강화는 군사적 성공으로 이어졌고 예속 노동력이 필수화되었다.

차이점

- 무산층의 해군력은 델로스 동맹의 제국주의적 착취로 이어졌고, 여기서 얻은 재정은 무산층 부양을 위한 공납금이 되었다.

 

- 정치적 평등은 있었으나 경제적 평등은 없었다.

 

- 상품화폐에 개방적 태도를 가졌으며 이는 점차 시민 간 분화를 심화시켰다.

 

- 곧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 제국주의적 착취가 아닌 인근지역을 직접 지배했다. 이는 중무장 보병의 경제적 기반으로 충분했기에 동맹시의 착취가 따로 필요하진 않았다.

 

- 개혁으로 정치적 평등을 이루었으며 이론적으로 경제적 평등 또한 이루었다.

 

- 평등을 위해 극단적인 폐쇄주의로 치달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형적인 폴리스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두 폴리스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여 폴리스 세계의 패권을 이루었다. 한 세계의 두 패권은 충돌하기 마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가 발발한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왜 승리했는지는 잘 안 나와있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며 아테네 제국은 해체되었다. 아테네 사회 내에서 빈부 간 격차(뭐가 원인이었지)와 사회적 갈등의 심화가 지속되었고, 제국의 해체는 식민지에서 걷어 들인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만성적 실업과 식량부족을 겪었다. 빈부의 격차는 다시 민주정을 무너뜨리고 부자들의 과두정을 불러왔고, 시민들의 무장이 약해지자 용병을 고용했다. 용병 고용은 역시 아테네의 재정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용병고용이 만연한 폴리스 세계에 군대는 전문화 되었고, 군대는 점차 폴리스로부터 독립된 직업적 전쟁집단이 되었다. 폴리스 세계의 원리인 아무추어리즘은 모습을 감추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의 체제는 해체된 다른 폴리스들을 규합하는데 적합하진 않았다. 패권의 충돌은 두 패권 모두 몰락시켰고, 폴리스 세계는 무질서가 되었다. 전쟁의 여파는 스파르타에 ‘동등자들’의 감소를 불러왔다. 부득이하게 혼성군을 편성했지만 동등자들로만 구성된 군대보다 전력이 떨어질 수박에 없었고, 부족해진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 용병을 고용했지만 이들의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벌이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한편 전쟁 후 상품화폐와의 접촉은 동등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분화를 일으켰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파르타의 발전 원리는 역설적으로 그 승리 때문에 무너지게 되었다.



약해진 스파르타는 테베에게 패배했고(BC 371), 메세니아인은 드디어 독립을 쟁취했다.(BC 371) 하지만 폴리스 세계의 무질서는 극복되지 못했고, 결국 내전으로 소비된 폴리스 세계의 역량은 마케도니아의 정복을 막지 못했다.(BC 338)


 

헬레니즘 세계: 영토 왕국들의 성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은 불가사의하고 낭만적인 것이어서 정작 광활한 제국을 유지할 기초를 세우지 못하고 후계자조차 내정하지 않은 채 대왕이 죽자 제국은 분할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속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안티고노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고 제국을 분할했으며 이 왕조들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제국의 영역은 다른 소규모 왕조들로 독립했다. ‘상속자들’의 시대가 ‘후예들’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정세는 고착화됐고 3개의 강대국과 여럿 소국들이 균형과 긴장을 맞추는 본격 헬레니즘판 삼국시대가 열린 것.



이 시기 광활한 제국들은 영토 왕조로써 폴리스적인 원리로 지탱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도와 사회구성, 문화 역시 헬레니즘 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넓은 영토 안에 대부분의 지역은 토착민이 사는 농촌이었는데, 농민들은 군주에게 예속되었으며 수탈에 고통 받으며 도시 인구를 부양했다. 영토 안에 섬처럼 있는 도시들은 그리스·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자들과 이민자, 상인과 용병, 그리고 그들의 노예가 거주했다. 이곳은 왕조의 행정과 경제생활의 중심지었다. 교역범위의 팽창은 통화량의 증대, 표준화폐의 발달, 즉 상업의 발전을 불러왔다. 군주의 영향이 약한 곳은 총독을 두어 속주로 삼았는데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영토 왕조의 정치체제는 군주정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영토의 결과는 ‘상속자들’의 폭력의 결과였으며 ‘상속자들’은 군 지휘관 출신이었다. 또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충돌 속에서 가장 적합한 체제는 군주정이었다. 다만 영토를 관리할 합리적인 관료제가 발달하지 못했고 이 간극은 종교와 이념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도시의 상업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그 발전정도는 한계적이었다. 농업과 제조업의 발전수준이 상업의 발전수준의 발목을 잡았고, 해적의 창궐과 국가의 통제가 상업의 발전을 억제했다. 특히 강대국들이 경쟁하는 시대에서 군주들은 일종의 중상주의적 경향을 띄었고, 따라서 국가가 생산과 유통을 독점했다.



헬레니즘 문화는 아시아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의 도시 생활 전개에 따라 발전했다. 다양한 이민족의 언어에서 출신은 달라도 공통의 그리스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리스인들이 평준화·보편화 되는 경향을 불러왔다. 또한 공통의 그리스어는 아시아 토착민들의 헬레니즘화에 필요한 요건이기도 했다. 예술가들은 늘어나는 도시 인구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기교나 가벼운 취향을 중시했고 성격은 점차 전문화되었다. 반대로 극소수 지식인들을 겨냥하고 그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등장한 ‘학자들’은 탐구영역을 더 세분, 전문화했다.



폴리스 공동체의 해체에 따라 철학 사조는 보편주의적 가정에 기반한 개인주의적 해결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혼란한 정세 속에서 시민들은 신비주의와 동방종교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그러나 이런 철학, 신비주의와 종교는 헬레니즘 출신 노예나 학자들에 의해 로마로 유입되면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영토 왕조들의 최후는 세력 간 균형이 무너지고 이탈리아 반도에서부터 제국의 기초를 쌓은 로마가 개입하면서 흔들린다. 결국 BC 30년 악티움 해전을 끝으로 로마제국의 세력으로 흡수되면서 시대는 로마의 역사로 흘러간다.


 

로마 세계: 지중해 제국의 성쇠


1) 로마 시민 공동체의 탄생과 발전


처음 로마의 역사는 왕정기(BC 753~509)로 시작하는데 사실상 귀족정의 도시국가였다. 소수의 혈통 귀족이 지주층을 이루고 이외의 농민들을 피호민화 시켜서 예속농민층으로 만들었다. 이들 귀족은 자신의 가계와 비혈통의 가속들로 정치집단인 ‘쿠리아’를 이루었다. 즉, 초기 폴리스 귀족의 ‘형제단’과 마찬가지이다. 전쟁 또한 쿠리아에서 파견한 300명의 정예 기병이 전력의 핵심을 이루면서 치러졌다.



역시 그리스 폴리스들의 일반적 발전 패턴으로 로마 또한 중무장 보병 밀집 대형 전술을 도입하면서 귀족정이 위협을 받는다. BC 6C 중엽 세르비우스 왕의 군제 개혁으로 이 전술이 도입되었고, 결과는 공동체 방위에 능동적인 시민 계층의 확대를 불렀으며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와는 달리 혈통귀족들은 왕정에 반란을 일으켜 공화정의 시대(BC 509~AD 1C)를 불러왔고 평민층과의 신분투쟁으로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다. 호민관 제도, 쿠리아회보다 민주적인 트리부스 회의, 「12표법」이라는 성문법 제정과 공포, 모든 시민의 상고권 인정, 평민에 대한 정무관 직의 개방과 평민회 결의의 법적 효력 획득이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무장 보병 밀집 대형 전술이 그리스 폴리스들처럼 평민들에게 일정 권력을 주었지만, 소수의 부유한 평민들이 정무관 직을 통해 원로원에 진출하고 이들이 새로운 특권 신분을 형성하면서 폴리스의 민주정과는 다른 공화정의 기틀을 확립해나간다. 이들 평민부유층은 기존 귀족과 함께 ‘신귀족’을 형성했고, 호민관 직은 이들을 대변하는 변질된 직책이 되었으며 평민회의 권력 또한 쇠락했다. 이시기 백인조회와 군사편제는 군복무와 정치권력이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여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공화정 로마가 평민층의 정치권력 없이도 그리스 세계 이상의 군사적 성공을 가질 수 있었던 요인으로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시민권 정책을 꼽을 수 있다. 그리스 폴리스들이 시민들의 참정권은 확대하지만 시민권 자체를 폐쇄적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대비된다. 이 로마의 시민권 정책은 정복한 외국인들을 동화했고 그에 따른 인력의 증강으로 군사력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2)로마 시민 공동체의 해체: 공화정 후기(BC 2C~AD 1C)


공화정이 불러온 군사적 성공은 역설적으로 공화정 로마의 위기를 초래한다. 오랜 전쟁은 남성노동력의 부족으로 농촌의 황폐화를 불러왔고, 전쟁에 출전했던 시민들은 역으로 무산자로 전락해갔다. 이는 다시 로마 병력의 손해를 의미한다. 반대로 신귀족들은 이들 공유지를 사유화하고 대토지를 경영했으며 부족한 병력은 용병들과 전문화된 군지휘관에게 맡겼다. 상인 및 금융업자들은 로마에 군수품을 조달하거나 자본을 빌려주고, 속주 세금 징수를 대행하며 정치권력을 강화했다. 이들 또한 환금 작물의 특화재배나 방목업과 같은 대토지를 경영했고, 부족해진 곡물 수입은 속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다.



공화정과 군사적 성공이 초래한 대규모 노예노동 조직과 농업경영의 결합은 폴리스 세계가 말기에 보여준 모순과 비슷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무산화된 농민들을 다시 유산화하기 위한 공유지의 회수와 재분배 같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라쿠스 개혁의 실패는 곧 공화정이 자체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산화된 시민들을 사병화한 군지휘관들이 원로원 귀족들보다 실질적인 권력, 로마인들의 지지 모두 앞서게 되었고 제 1, 2차 삼두정치로 볼 수 있듯 이들 군지휘관들의 정치가 시작된다.


 

3) 시민 공동체에서 제국 체제로의 이행


곧 삼두정치는 그 경쟁의 최종 승리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원수정으로 변화한다. 로마의 영토를 원수정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관료제의 발전이 불가피했고, 특히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의 도입을 주목할 만하다. 상비군제들은 자영 농민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면서 농민층의 지지를 불러왔고, 군대에게 돌아가는 후한 보상은 그들의 충성을 불러왔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원수는 상비군과 관료제의 유지, 로마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재정을 확보해야만 했다. 이 재정은 ‘황실재정’에서 충당했는데, 원수관활령, 광산, 원수 관할 속주들의 세수, 특산품 전매이익 등이 황실재정으로 들어갔고, 이 재정은 원로의 승인 없이 처분 가능한 것이었다.



원수정으로의 교체 이후 로마는 200년 간의 평화를 맞는다.(Pax Romana) 이 시기 동안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던 서부 속주들에 대토지 경영이 빠르게 이식되고 로마 문화가 유입되어 급속히 발전했다. 즉 서부 속주들이 급속히 로마화 되었으며 이 속주의 귀족들이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보면 알겠지만 로마의 평화 동안 서부 속주의 농민들은 대토지 경영의 강도 높은 착취와 황실 재정의 조세 요구 속에 고통 받았다. 이와는 달리 동부 속주는 상공업을 차지하는 중산층의 존재가 있었고, 지주와 국가의 요구 또한 농민들에게 재생산의 여지를 남겨두는 편이었다.



서부 속주민들은 농촌을 떠나 번영하는 속주 도시들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제국 군대에 자원했다. 이는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용이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이 AD 212년 카라칼라 황제는 모든 로마의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칙령을 반포하는데, 그 이면엔 이미 시민권의 인플레로 더 이상 시민권이 특권이 되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이 있다.


 

4) 제국 체제의 해체: 제정 후기(3~5C)


제국 체제 해체의 요인은 대표적으로 1. 게르만 족 대이동, 2.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 3. 로마 군대의 황실 개입과 정치의 혼란 등이 있다. 제국은 군대의 충성을 매수하고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황실 재정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따라 속주의 조세 부담을 확대하고 통화량을 늘렸다. 그러나 이는 다시 재정 악화를 심화시켰고 무엇보다 속주 농촌노동력의 감소를 불러왔다.



사실 제국의 농촌 경제는 노예노동력의 수급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로마의 평화 동안 정복 전쟁이 줄어들어 노예수급의 경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예노동에 기초한 대농장 경영은 타격을 입고 지주귀족들은 점차 노예제보다 소작제를 선호했다. 하지만 농촌 인구가 격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작제 또한 용이한 방법은 아니었다.



제국은 농촌 경제에 세금을 더 이상 부과할 수 없음을 알고 도시 부문에 조세 부담을 전가하려고 했다. 도시 역시 절망적인 상황임은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통화개악은 물가 및 임금을 올리고, 이는 수공업 생산을 침체시켰으며, 결국 무역이 퇴조되는 연쇄적 파급효과를 미쳤다. 여기에 막중한 조세 부담까지 떠안게 되니 심지어 속주 상층민들은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이동했다.



권력도, 농촌경제도, 도시경제도 답이 없는 상황에서 로마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보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게르만 족에 귀의하거나 협조하는 식의 방식을 취했다. 주민들은 철학적,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졌으며 그리스도교 및 동방종교에서 구원을 찾았다.



로마가 망하는 흐름에서 그나마 몇몇 현명한 황제들이 강력한 황제권으로 제국 체제 유지를 위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강력한 황제권을 위해 이들은 독재주의, 전제정으로 통치했고 동방적 궁정 의례나 호칭의 변화로 신격화를 도모했다. 더욱더 관료제를 확대했으며 제국 군대에 이민족들을 편입시키는 쪽으로 군대를 개편했다. 통화를 개량하고 물가 안정을 꾀했으며 떠나가는 농민들을 붙잡고 세수를 매기기 위해 「원적법」을 반포했다. 하지만 농민이 붙잡힌 농촌은 대토지 소유자의 대농장이었고 농민들은 예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제국 후기의 개혁은 오히려 대지주 귀족들의 배를 불려주고 재정악화를 불러왔다.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지주귀족들은 봉건적 지주가 되어갔다. 여기에 계속해서 이주해 들어오는 게르만족이 로마 군대를 내부적으로 무너뜨리면서 치명타를 가했고, 로마 서부 속주 대지주들이 게르만족의 수장들에게 귀의하면서 로마 제국은 끝장난다.

 

 

 

요약 발제는 이쯤 끝내고 다시 이 책의 서문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역사의 동력이 사회의 전체성이라는 것에 동의하는데, 특히 사회 전체(全體)의 발전 원리가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모순이 가장 큰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사 강의 1장에서부터 이 생각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폴리스 초기의 성립 원리, 즉 이데올로기는 국방에 있고 군복무를 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춘 부유층·귀족만이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모두 초기엔 귀족정이었는데, 이 국방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도입된 중무장 보병 밀집 대형 전술은 역설적으로 귀족정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런데 진짜 재밌는 것은 전술의 변화에 따른 군사적 성공이 시민 간의 불화를 일으키게 되고 이는 다시 역설적으로 민주정을 무너뜨리고 귀족정으로 회귀하게 하는 것이다.(아테네 후기 부자들의 과두정, 로마의 경우엔 공화정)



개인적으로 그리스는 망하고 로마는 흥하게 된 차이점은 이 귀족정으로 회귀할 때 발생하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는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는 귀족정으로 회귀하면서 발생한 모순, 국방은 해야 하는데 시민군이 없으니 용병을 고용했으나 재정악화에 빠지는 악순환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에 멸망해버렸고, 로마는 그 시기를 탄력적인 시민권 정책과 원수정으로 극복한다. (다만 어째서 로마는 그리스와는 다른 시민권 정책을 도입했는지, 원수정이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개인의 카리스마가 있어서 가능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또 그리스의 민주정이든 로마의 공화정이나 원수정이든 노예제라는 생산양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도 재밌다. 역시나 노예제 또한 자체적인 모순을 갖고 있으니, 시민들이 정치에 종사해도 문명이 유지될 만큼의 생산력은 제공했지만 그 이상의 발전을 구가할 생산력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개인의 생산의지는 딱 그 정도. 그리고 노예 수급을 위해 정복전쟁은 지속되어야 하나 로마가 최대 판도를 이룩한 이후에 더 이상 정복을 하지 못한 것처럼 정복 전쟁 또한 한계가 있다.(만약 무한한 정복전쟁이 가능하더라도 정복할 땅이 없으면...)



생산양식과 이데올로기의 모순, 그리고 그것의 극복에 의한 역사전개는 고대 지중해 세계 이후의 역사에도 적용된다. 농노제와 봉건제 역시 생산력의 한계와 나눠줄 봉토가 부족할 때 절대왕정과 중상주의로 이행했고, 이는 다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 제도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 한 가운데에 있다. 이념 없는 포퓰리즘의 난무와 장기 저성장 국면에서 더 이상의 재생산이 불가능할 지경에 있게 된 것. 금융위기, 세계각지에서 일어나는 테러, 북한의 핵도발, 강대국들의 군비증강과 군사위기 등은 이런 모순이 터지는 역사의 현상일 뿐이다. (아마 서문에서 저자가 말한 민족분단과 계급갈등 역시 같은 맥락일 것)



역사의 이행기 속에서 역사학자가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는 고민하기 좋은 소재다. 다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시대는 저절로 그 다음 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 책을 읽으면 역사가 마치 자연법칙 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분명 이행기마다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주체들이 있었다. 그리스에선 전쟁에 나선 시민들이 귀족들로부터 정치권력을 찾았듯이, 로마에서 군인들이 원수정을 펼쳤듯이, 중세사회에서 농노들이 영주로부터 자유민신분을 찾았듯이 말이다. 근대의 시민혁명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고자 한다면(아니면 말고), 지금 모순의 가장 근원적인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할 주체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 이행기의 끝은 문명의 퇴조나 파괴가 아니라 명백한 발전이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 읽고 궁금한 점 적고 끝내겠음.


1. 앞에서 말했듯이 왜 로마는 탄력적인 시민권 정책이나 원수정이 가능했는가?


2. 헬레니즘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음. 폴리스 이데올로기가 시민군을 만들었고, 로마는 황실재정이 상비군을 유지했다고 나오는데 헬레니즘 영토 왕조들은 그런 게 무엇인지 모르겠음.


3. 애초에 마케도니아가 혼란한 폴리스 세계를 정복할 정도의 국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로마 부분 서술이 이탈리아 반도 시절에 있었을 때도 자세하다면 마케도니아도 그러해야 한 거 아님? 알렉산더 대왕이 나타나서 쓸어버렸다 정도만 있어서 아쉽다. 


프랑스 혁명과 1987, 그리고 촛불 혁명. 역사

프랑스 대혁명은 통상적으로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회한 시점부터 시작을 잡는다. 삼부회는 소집되자마자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을 드러냈고, 평민 대표들은 6월 17일 ‘국민의회’를 자처했다. 국왕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6월 27일 세 신분의 합류를 인정했고, 삼부회는 7월 6~7일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9일 ‘제헌국민의회’로 공식 출범했다. 입헌주의가 실현되는 것에 놀란 국왕은 파리에 군대를 모았고 평민 재상 네케르를 해임했다. 국왕이 일으킨 반동에 의회는 무력할 뿐이었다.





 

이 반동에서 혁명을 구출한 것은 민중들의 바스티유 함락이다. 민중들은 바스티유 이전부터 여러 차례 봉기를 통해 무기를 들고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특히 상퀼로트라고 불리는 수공업자 중심의 민중들은 파리 도시 민중의 의식화된 전위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부르주아들은 이 민중들을 잠재울 것이냐, 연대할 것이냐의 기로에 종종 서있게 된다. 1791년 10월 개원한 입법의회에서 우파인 ‘페이양 파’는 혁명을 멈추려고 했고, 좌파인 ‘지롱드 파’는 민중과의 결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지롱드 파도 1792년 8월 10일의 사건에 이르자 민중을 배반한다.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왕이 프랑스 혁명을 분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프랑스는 이들에게 선전포고했고, 우습게도 프랑스 국왕은 자국이 아니라 외국군대의 승리를 기대했다. 그 기대대로 프랑스 군대는 패배했고, 국왕은 법령의 재가를 거부했다. 이에 프랑스 민중들이 제대로 빡치게 되는데 튀일리 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들이 지방에서도 빗발치게 된 것. 이 사건은 민중을 국민에 통합시키고 민주적이며 민중적인 공화국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제2의 프랑스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지경에 이르자 지롱드 파는 민중들에게 질렸고 그 이외의 혁명적 부르주아 전위들은 민중운동과 결합하게 된다. 여기서 지롱드 파와 산악파가 나뉜다.








 

근데 기가 막힌 건 이 산악파마저 민중들과 결별한다는 것이다. 상퀼로트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산악파는 그들의 압력을 받아야만 했지만 이제 산악파는 민중운동을 길들이려고 했다. 그들의 긴장은 1794년 ‘풍월의 위기’에서 터지게 된다. 1794년의 식량 위기로 인한 민중들의 불만이 과격파와 결합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제거하고 상퀼로트를 탄압한 것이다. 민중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은 산악파는 그 민중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결국 열월의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난다. 그 이후 프랑스 대혁명은 뭐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권력이 수렴되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이후의 1830년 7월, 1848년 2월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19세기 자유주의-민족주의 혁명도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된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유럽 대륙에는 시대를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려놓는 반혁명인 ‘빈체제’가 구축된다. 그에 따라 프랑스에는 루이18세의 복고왕정이 들어선다. 빈체제는 18세기 절대주의를 수호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억압했는데 그 예외가 있었으니 그리스의 민족운동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억압상태에 있는 그리스의 독립 전쟁을 옹호했고, 그리스는 독립한다.




 

최초의 민족주의 혁명은 최초의 자유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루이 18세는 1814년 헌장으로 왕권의 신성함은 여전하지만 사상과 종교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양원제 의회를 수립했다. 그러나 그 다음 국왕인 샤를 10세는 아빠보다 훨씬 반동적인 인물로, 1830년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자 7월 쿠데타를 일으켜 언론을 탄압하고 부르주아의 선거권을 박탈한 것이다. 이를테면 1987년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을 엎고 호헌을 하겠다고 통수를 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 언론인, 학생, 의회주의자들이 1814년 헌장으로 복귀하라고 요구했고 파리 노동자들과 이탈한 군대병력이 합세하여 7월 혁명을 완수해냈다.




 


근데 7월 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왕정의 완전한 소멸과 공화정을 요구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1814년의 헌장에서 멈추기를 원했다. 기본은 입헌 ‘왕정’주의였으니 ‘오를레앙 공 필리프’라는 사람을 데려와 왕으로 삼은 것이다. 7월 혁명을 성공시킨 자유주의자들은 오히려 혁명의 의미를 축소했고 민주주의를 두려워했으며 자기들만 선거를 할 수 있길 원했다. 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은 실망했으며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렇게 불만이 고조된 상태에서 1846년, 1847년의 흉작은 재정위기를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1848년 2월 혁명이 터지게 된다.



 

사실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이 투입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시가전을 벌인 끝에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수 있었다. 2월 혁명의 임시정부는 성인 보통남자에게 선거권을 허용하고 검열을 폐지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엔 헌신했지만,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요구는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들어주는 정도였다. 이에 반발하여 파리 노동자들이 6월 봉기를 일으키나, 온건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은 이를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으로 받아들였고 철저하게 조져버린다. 탄압의 결과는 다시 공화정을 불구로 만들어버렸고,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로 등극한다.(Sigh...)





 

1848년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의 해였다. 그 혁명은 자유주의-민족주의 혁명이었고 결과는 하나 같이 패배로 끝난다. 그런데 이 패배가 실패는 아니었는데, 혁명과 반동을 반복하면서 국가기구 자체가 억압 일변도가 아닌 일정 관용을 보여주는 식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산업화의 진전과 정치권력의 점진적 획득으로 자유주의자들은 현실에 만족할만하게 되었다. 사실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봐야겠지. 민족주의 역시 초기에는 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에 같이 성공했으며, 독일 같은 나라에선 지배계급 자체가 민족주의를 흡수하여 국가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어진 대불황, 제국주의의 확대, 민족국가간의 대결 때문에 후기 민족주의가 매우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겠다. 그래서 세계대전이 일어나기도 하고.



 


 

영화 <1987>을 보고 시간이 지나자 물밀 듯이 다가온 감동이 좀 진정되고 책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987년의 혁명은 거의 30년을 지탱한 군부독재세력과 그 관료들의 지배에 저항한 시민 혹은 민중들의 저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영화가 미처 다루지는 못했지만 6월 다음의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은 고조되었던 혁명의 분위기에서 언제나 무시 받은 노동권을 바로세우고 민주노조를 설립한 또 다른 혁명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YS-DJ-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소위 민주정부는 말 그대로 정치적 민주주의에 헌신했음은 분명해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노동운동을 짓밟았다. 그러면서 해방 이후 한국 지배세력의 분명한 한 축이었던 재벌들과는 영합했다. 그 결과는 다시 MB-503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지배세력 끄나풀들의 반동이었으며 집회·시위의 탄압, 언론탄압, 민간인 사찰, 국정원을 이용한 여론조작과 불투명선거, 온갖 규제의 철폐와 노동조합 파괴, 그리고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반동을 다시 ‘촛불’혁명으로 극복했다.




 

이제는 어떤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인간적으로 훌륭한 대통령 문재인과 정의로운 자유주의 시민들은 정치적 민주주의 회복에 힘을 쏟고 있다. 503과 비선실세를 감옥에 쳐넣었으며 언론의 자유를 되찾았고 지금은 MB를 조질려고 애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 최고재벌총수까지 감옥에 넣었고 최저임금을 인상했으며 일정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혁명을 완수한 사람들은 그 혁명의 분명한 하나의 동력이었던 노동운동을 외면하고 있다. 청와대의 굴욕적인 만찬 참석 요구를 물리치면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외면한 적폐가 된다. 가장 먼저 촛불을 들었고 보수정권에 맞서 싸워 감옥에 가있는 민주노총위원장의 석방 요구는 절차를 무시한 떼쓰기로 여겨졌다. 그들은 노무현을 죽인 범인 중 한 명이며, 보수정권 9년 동안 투쟁다운 투쟁은 하지 않았다가 문재인이 들어와서야 악을 쓰는 비겁자가 되었다. 모순되지 않은가? 일단, 노무현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죽였는지는 관심이 없고 위원장이 박근혜와 싸우다 감옥에 갔는데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한다.






처음에는 실망했다. 그 겨울 얼음장 같은 추위 속에서 구호도 외치고 팔뚝질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고 사업도 오질나게 벌렸더랬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환영했고 응원해주었다. 연단에 노동자들이 나왔을 때 그들은 환호했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와 꽤나 급진적인 주장을 해도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적폐청산, 그것도 정치적 민주주의를 바로잡는 것에 있으며 다른 얘기를 하는 순간 그도 적폐에 들어간다. 나는 처음에 사람들이 변한 줄 알고 크게 실망하고 슬퍼했다. 






근데 역사를 보니 그런 게 아니더랬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가 거진 100년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마저도 결국 보수화의 역사를 걸었다. 그러니 한국의 민중들도 그런 것이다. 지나온 역사도, 그만큼 남은 역사도 무거운 것이다. 전체의 역사는 망망한 대해와 같은데 혁명은 일순간의 파도에 불과하니 파도만 보고서 어찌 대해원을 알 수 있겠는가. 다만 그저 바다의 한 방울이 되어 강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역사를 더듬다 보면 다시 한 번 파도를 몰아칠 과제를 마음에 품을 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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