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1987, 그리고 촛불 혁명. 역사

프랑스 대혁명은 통상적으로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회한 시점부터 시작을 잡는다. 삼부회는 소집되자마자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을 드러냈고, 평민 대표들은 6월 17일 ‘국민의회’를 자처했다. 국왕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6월 27일 세 신분의 합류를 인정했고, 삼부회는 7월 6~7일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9일 ‘제헌국민의회’로 공식 출범했다. 입헌주의가 실현되는 것에 놀란 국왕은 파리에 군대를 모았고 평민 재상 네케르를 해임했다. 국왕이 일으킨 반동에 의회는 무력할 뿐이었다.





 

이 반동에서 혁명을 구출한 것은 민중들의 바스티유 함락이다. 민중들은 바스티유 이전부터 여러 차례 봉기를 통해 무기를 들고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특히 상퀼로트라고 불리는 수공업자 중심의 민중들은 파리 도시 민중의 의식화된 전위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부르주아들은 이 민중들을 잠재울 것이냐, 연대할 것이냐의 기로에 종종 서있게 된다. 1791년 10월 개원한 입법의회에서 우파인 ‘페이양 파’는 혁명을 멈추려고 했고, 좌파인 ‘지롱드 파’는 민중과의 결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지롱드 파도 1792년 8월 10일의 사건에 이르자 민중을 배반한다.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왕이 프랑스 혁명을 분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프랑스는 이들에게 선전포고했고, 우습게도 프랑스 국왕은 자국이 아니라 외국군대의 승리를 기대했다. 그 기대대로 프랑스 군대는 패배했고, 국왕은 법령의 재가를 거부했다. 이에 프랑스 민중들이 제대로 빡치게 되는데 튀일리 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들이 지방에서도 빗발치게 된 것. 이 사건은 민중을 국민에 통합시키고 민주적이며 민중적인 공화국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제2의 프랑스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지경에 이르자 지롱드 파는 민중들에게 질렸고 그 이외의 혁명적 부르주아 전위들은 민중운동과 결합하게 된다. 여기서 지롱드 파와 산악파가 나뉜다.








 

근데 기가 막힌 건 이 산악파마저 민중들과 결별한다는 것이다. 상퀼로트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산악파는 그들의 압력을 받아야만 했지만 이제 산악파는 민중운동을 길들이려고 했다. 그들의 긴장은 1794년 ‘풍월의 위기’에서 터지게 된다. 1794년의 식량 위기로 인한 민중들의 불만이 과격파와 결합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제거하고 상퀼로트를 탄압한 것이다. 민중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은 산악파는 그 민중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결국 열월의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난다. 그 이후 프랑스 대혁명은 뭐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권력이 수렴되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이후의 1830년 7월, 1848년 2월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19세기 자유주의-민족주의 혁명도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된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유럽 대륙에는 시대를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려놓는 반혁명인 ‘빈체제’가 구축된다. 그에 따라 프랑스에는 루이18세의 복고왕정이 들어선다. 빈체제는 18세기 절대주의를 수호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억압했는데 그 예외가 있었으니 그리스의 민족운동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억압상태에 있는 그리스의 독립 전쟁을 옹호했고, 그리스는 독립한다.




 

최초의 민족주의 혁명은 최초의 자유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루이 18세는 1814년 헌장으로 왕권의 신성함은 여전하지만 사상과 종교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양원제 의회를 수립했다. 그러나 그 다음 국왕인 샤를 10세는 아빠보다 훨씬 반동적인 인물로, 1830년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자 7월 쿠데타를 일으켜 언론을 탄압하고 부르주아의 선거권을 박탈한 것이다. 이를테면 1987년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을 엎고 호헌을 하겠다고 통수를 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 언론인, 학생, 의회주의자들이 1814년 헌장으로 복귀하라고 요구했고 파리 노동자들과 이탈한 군대병력이 합세하여 7월 혁명을 완수해냈다.




 


근데 7월 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왕정의 완전한 소멸과 공화정을 요구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1814년의 헌장에서 멈추기를 원했다. 기본은 입헌 ‘왕정’주의였으니 ‘오를레앙 공 필리프’라는 사람을 데려와 왕으로 삼은 것이다. 7월 혁명을 성공시킨 자유주의자들은 오히려 혁명의 의미를 축소했고 민주주의를 두려워했으며 자기들만 선거를 할 수 있길 원했다. 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은 실망했으며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렇게 불만이 고조된 상태에서 1846년, 1847년의 흉작은 재정위기를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1848년 2월 혁명이 터지게 된다.



 

사실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이 투입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시가전을 벌인 끝에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수 있었다. 2월 혁명의 임시정부는 성인 보통남자에게 선거권을 허용하고 검열을 폐지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엔 헌신했지만,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요구는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들어주는 정도였다. 이에 반발하여 파리 노동자들이 6월 봉기를 일으키나, 온건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은 이를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으로 받아들였고 철저하게 조져버린다. 탄압의 결과는 다시 공화정을 불구로 만들어버렸고,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로 등극한다.(Sigh...)





 

1848년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의 해였다. 그 혁명은 자유주의-민족주의 혁명이었고 결과는 하나 같이 패배로 끝난다. 그런데 이 패배가 실패는 아니었는데, 혁명과 반동을 반복하면서 국가기구 자체가 억압 일변도가 아닌 일정 관용을 보여주는 식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산업화의 진전과 정치권력의 점진적 획득으로 자유주의자들은 현실에 만족할만하게 되었다. 사실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봐야겠지. 민족주의 역시 초기에는 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에 같이 성공했으며, 독일 같은 나라에선 지배계급 자체가 민족주의를 흡수하여 국가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어진 대불황, 제국주의의 확대, 민족국가간의 대결 때문에 후기 민족주의가 매우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겠다. 그래서 세계대전이 일어나기도 하고.



 


 

영화 <1987>을 보고 시간이 지나자 물밀 듯이 다가온 감동이 좀 진정되고 책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987년의 혁명은 거의 30년을 지탱한 군부독재세력과 그 관료들의 지배에 저항한 시민 혹은 민중들의 저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영화가 미처 다루지는 못했지만 6월 다음의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은 고조되었던 혁명의 분위기에서 언제나 무시 받은 노동권을 바로세우고 민주노조를 설립한 또 다른 혁명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YS-DJ-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소위 민주정부는 말 그대로 정치적 민주주의에 헌신했음은 분명해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노동운동을 짓밟았다. 그러면서 해방 이후 한국 지배세력의 분명한 한 축이었던 재벌들과는 영합했다. 그 결과는 다시 MB-503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지배세력 끄나풀들의 반동이었으며 집회·시위의 탄압, 언론탄압, 민간인 사찰, 국정원을 이용한 여론조작과 불투명선거, 온갖 규제의 철폐와 노동조합 파괴, 그리고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반동을 다시 ‘촛불’혁명으로 극복했다.




 

이제는 어떤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인간적으로 훌륭한 대통령 문재인과 정의로운 자유주의 시민들은 정치적 민주주의 회복에 힘을 쏟고 있다. 503과 비선실세를 감옥에 쳐넣었으며 언론의 자유를 되찾았고 지금은 MB를 조질려고 애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 최고재벌총수까지 감옥에 넣었고 최저임금을 인상했으며 일정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혁명을 완수한 사람들은 그 혁명의 분명한 하나의 동력이었던 노동운동을 외면하고 있다. 청와대의 굴욕적인 만찬 참석 요구를 물리치면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외면한 적폐가 된다. 가장 먼저 촛불을 들었고 보수정권에 맞서 싸워 감옥에 가있는 민주노총위원장의 석방 요구는 절차를 무시한 떼쓰기로 여겨졌다. 그들은 노무현을 죽인 범인 중 한 명이며, 보수정권 9년 동안 투쟁다운 투쟁은 하지 않았다가 문재인이 들어와서야 악을 쓰는 비겁자가 되었다. 모순되지 않은가? 일단, 노무현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죽였는지는 관심이 없고 위원장이 박근혜와 싸우다 감옥에 갔는데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한다.






처음에는 실망했다. 그 겨울 얼음장 같은 추위 속에서 구호도 외치고 팔뚝질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고 사업도 오질나게 벌렸더랬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환영했고 응원해주었다. 연단에 노동자들이 나왔을 때 그들은 환호했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와 꽤나 급진적인 주장을 해도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적폐청산, 그것도 정치적 민주주의를 바로잡는 것에 있으며 다른 얘기를 하는 순간 그도 적폐에 들어간다. 나는 처음에 사람들이 변한 줄 알고 크게 실망하고 슬퍼했다. 






근데 역사를 보니 그런 게 아니더랬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가 거진 100년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마저도 결국 보수화의 역사를 걸었다. 그러니 한국의 민중들도 그런 것이다. 지나온 역사도, 그만큼 남은 역사도 무거운 것이다. 전체의 역사는 망망한 대해와 같은데 혁명은 일순간의 파도에 불과하니 파도만 보고서 어찌 대해원을 알 수 있겠는가. 다만 그저 바다의 한 방울이 되어 강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역사를 더듬다 보면 다시 한 번 파도를 몰아칠 과제를 마음에 품을 뿐이겠다.